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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의 정기를 이은 천년의 아름다운 사찰, 한국불교의 중흥을 꽃피운 곳, 국보 제49호인 대웅전 및 보물 제1263호인 노사나불괘불탱, 거문고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 대웅전, 거문고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입니다. 근대에는 경허스님이 주석하시면서 동방 제일 선원으로 명성을 높였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우리 불교를 지켜내신 만공스님과 더불어 근대 한국 불교의 중흥을 선도한 사찰입니다. 먼저 이곳은 백제 위덕왕 재위 시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경허, 만공, 혜월, 벽초 선사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이자 선풍을 진작시킨 선맥의 본산으로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설화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덕산향토지에 실려 있는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이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 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계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 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낭자의 한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19세기말 조선의 명운은 암울하고 희미했습니다. 서구 열광과 일본은 폭력을 앞세워 조선을 착취할 기회를 노렸고 희망을 잃은 백성들은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500년 가까이 사대부에게 억압받아온 불교는 그 본모습조차 사라져 가고 있었을 때, 홀연히 등장한 한 스님으로 인해 한국 불교는 다시 되살아납니다. 그의 이름은 경허스님입니다. 경허스님이 머물고 제자 만공스님이 중창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 수덕사는 오늘날 한국 선불교의 종가로 불립니다. 수덕사가 위치한 예산은 옛 백제의 터입니다. 백제는 침유왕 원년 중국 동진에서 온 천축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준 후 불교가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문헌 속에 기록된 백제의 사찰은 모두 12개인데, 오늘날까지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단 하나뿐입니다. 수덕사가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와 속고승전입니다. 이 문헌에서는 혜연스님이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을 독송하고 삼론을 강론했다고 합니다. 덕숭산과 수덕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만공스님입니다. 경허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은 만공스님은 40년 넘게 수덕사에 머물며 제자들을 키워내셨습니다. 경허스님이 선불교를 새로 일으키고 그 씨앗을 뿌린 분이라면, 만공스님은 스승이 씨를 뿌린 밭을 갈고닦으며 열매가 맺도록 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십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미나미 총독은 31 본산의 주지들을 불러 조선불교 진흥회의를 열었다. 미나미 총독은 호국의 성격이 강한 조선불교를 굉장히 경계했다. 그래서 사찰의 자주권을 박탈하고 31 본산의 주지들에게 일본 불교를 본받을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만공스님은 미나미 총독의 면전에서 주장자를 내리치며 일갈했다. `조선불교는 청정비구 교단이다. 어찌 감히 아내를 취하고 육식과 음주를 일삼는 일본 불교와 병합하려 하는가? 조선 승려 7천 명을 파계시킨 총독은 무간지옥에서 고통받을 것이다.` 그 후 덕숭산으로 돌아온 만공스님은 총독부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수행을 할 수 있는 선학원 설립을 주도했다. 일제의 압박으로 쓰러져가던 선불교는 수덕사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만공스님은 온몸을 바쳐 한국 불교의 청정함을 지켜내셨다.

     

    대웅전

    수덕사의 성보문화재 중 가장 으뜸은 국보 제49호인 대웅전입니다. 고려 충렬왕 34년에 지어진 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건축물입니다.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건축 시기가 명확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 한반도 목조건축물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수덕사 대웅전보다 앞선 시기에 건립됐다. 두 건물이 언제 건립되었다는 기록은 남은 것이 없고 중수 기록만 전해져서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중수 기록과 건축양식 등을 통해 대략적으로 건립연대를 추정하여 수덕사 대웅전보다 앞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고려 충렬왕 34년(1308)이다. 이와 같이 수덕사 대웅전의 건축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인 1936~40년에 걸쳐 대웅전을 완전 해체수리하던 중 대들보에서 건립연대를 적은 묵서명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과 기품이 묻어난다.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중에 건립 연도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건립 연도가 확실하여 한반도 건축사 연구에 중심이 되는 기준 중 하나를 제공하며, 대웅전 건물 그 자체로도 고려 목조건축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이 잘 보존된 점과 같은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거문고

    수덕사의 보물 중 하나는 바로 거문고입니다. 고려 공민왕이 연주했다고 하는 이 거문고는 고려 멸망 후 흥선대원군을 거쳐 구한말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700년이 넘는 긴 역사가 담긴 이 거문고가 수덕사에 오게 된 이유 역시 만공스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어느 날 수덕사 소유의 덕숭산 임야가 조선 왕실 소유로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 만공스님은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의친왕 이강을 찾아갔습니다. 첫 만남에서 만공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은 의친왕은 그 자리에서 만공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증표로 이 거문고를 선물하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수덕사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아픔을 겪은 조선 인조 때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조성되었고 경신대기근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던 조선 현종 때 노사나불쾌불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수덕사의 보물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조성되었다는 독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수덕사가 가진 신비한 힘 때문일 것이다. 그 신비한 힘은 바로 청정한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만들어낸 지극한 정성이자 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는 수덕사는 한국 근대 선불교의 종가이자 수많은 선사들을 배출한 요람입니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은 수덕사에서 한국 선불교의 꽃씨를 뿌렸고 벽초스님과 원담스님은 선방에서 수많은 스님들을 지도하며 꽃을 피워내셨습니다. 덕숭총림 수덕사는 세계일화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국 선불교의 정체입니다. 광복을 맞기 3년 전, 만공스님은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천일기도를 올렸습니다. 만공스님이 천일기도를 회향하고 나서 얼마 후, 조선은 그토록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만공스님은 광복의 기쁨보다 걱정이 더 컸습니다. 스님은 일제에 당했던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조선의 중생들을 어떻게 어루만져야 할지, 부처님의 자비와 가르침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찾았다. 세계일화 `이 세상은 한 송이 꽃이다.` 이것을 알고 살아간다면 온 세상이 평화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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