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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문화를 현대에 만날 수 있는 주요 문화재의 보물창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팔상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속리산 법주사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내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입니다. 진흥왕 14년(553)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신이 창건한 역사 깊은 고찰이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수많은 문화유산과 불교 전통을 간직한 호서지방 제일의 가람입니다. 속리산은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 불리다가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불렸습니다. 아홉 개의 봉우리가 활처럼 휘어진 산 아래 부처님의 법이 상주하는 곳, 중흥기를 맞이한 것은 성덕왕 때였습니다. 신심이 깊었던 성덕왕은 법주사를 중수하면서 가람 곳곳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건축물과 조각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신라 시대 석조 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이라 평가받는 보물들은 이때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법주사의 사세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유물은 바로 거대한 무쇠솥입니다. 매일 공양마다 이 솥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무려 3만 명이 먹었다고 하니 그 사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주사는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와 인연이 깊습니다. 호불 군주를 자처했던 세조는 신미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대사가 출가한 사찰이 바로 법주사였습니다. 세조와 신미대사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은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 훈민정음, 하지만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에서 세종은 사랑하는 아들과 왕비를 병으로 잃게 됩니다. 비통한 슬픔으로 무너진 세종을 다시 일으킨 것은 바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렇게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처음 만들어진 책이 바로 석보상절입니다. 석보상절의 숨은 공로자는 바로 신미대사였습니다. 어렵고 딱딱한 한자 안에 갇혀있던 부처님의 말씀은 신미대사의 손을 거쳐 아름다운 한글로 옮겨졌습니다. 백성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는 재위 기간 내내 몸과 마음의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조카 단종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괴로워하던 세조는 재위 10년째 되던 1464년 스승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법주사로 향했습니다. 법주사에 공양을 올린 세조는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신미 대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항상 부처님께 기도를 해주시고 사람을 보내어 자주 안부를 물어주시니 다만 황감할 뿐입니다.` 세조에게 법주사는 마음속 부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금동미륵대불

    법주사에 들어서는 순간,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금동미륵대불이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승병의 본거지였던 법주사는 왜군들로부터 가혹한 보복을 당해야 했습니다. 왜군들은 앙갚음으로 용화보전에 불을 질렀고 그 안에 모셔진 장륙상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전각과 불상은 없앨 수 있어도 법주사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동양 최대의 미륵불 입상으로 신라 36대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주조하여 1000여 년간 내려왔으나 대원군에 의해 `당백전`의 재료로 쓰기 위하여 훼철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1930년 장륙상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 1964년에 시멘트로 조성한 미륵대불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후 사십 년에 걸친 대불사 끝에 지금의 금동미륵입상으로 완공되었으니 무려 한 세기에 걸친 대불사라 할 것입니다. 이는 지극한 신심이 아니었으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세기의 불사이자 한국 불교의 역사입니다.

     

    팔상전

    법주사에서만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보물은 팔상전입니다. 탑이면서 동시에 정각의 역할까지 하는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목조탑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1968년 해체 수리 중 중심 기둥 아래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어 더욱 그 의미가 특별합니다. 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 중 유일하게 근대 이전에 지어진 5층 목탑입니다. 임진왜란 때 한 번 불탔으나 인조 2년(1624)에 승려 벽암이 주도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팔상전이라는 이름 때문에 8층 목탑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5층입니다. 벽면에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에서 중요한 8가지를 그린 팔상도가 있어 팔상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두 단의 석조 기단 위에 세워져 있고 기단 네 면의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습니다. 이 기단과 계단은 통일 신라 때의 것입니다. 각 층의 밑면은 정사각형이며, 1층과 2층은 다섯 칸, 3층과 4층은 세 칸, 5층은 두 칸으로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들어 안정감을 줍니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는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식이고 5층은 다포식입니다. 지붕은 꼭대기를 중심으로 네 개의 지붕면이 뻗어 있는 사모지붕이며 지붕 위 꼭대기 부분은 조선 시대의 것으로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필상전 내부 한가운데에는 5층 전체를 통과하는 기둥이 있습니다. 이 기둥의 네 면에는 팔상도가 두 폭씩 있고 그 앞에는 열반상과 삼존 불상이 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으로 건축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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