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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소나무와 닮은 사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께서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다 하여 찾으신 안동 봉정사, 대웅전, 극락전, 봉정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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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봉정사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에 위치 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입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자료들이 소실되어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1972년 극락전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할 때 상량문에서 고려시대 공민왕 12년 (1363)에 극락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기록이 발견되면서 봉정사 극락전이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작고 아담한 절이지만 산사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국보 제15호 극락전, 국보 제311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 고금당 등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경상북도 중북부에 위치한 안동은 유교의 고장으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께서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다 하여 찾은 곳 이 바로 천등산 봉정사입니다. 사찰이 품은 세월의 깊이는 일주문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랜 침묵과 풍화로 인해 해탈한 모습에는 평온하기 어려운 깊이가 서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품은 봉정사의 또 다른 수식어는 이곳의 가치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담고 있어 2018년 한국의 산사 일곱 곳 중 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전해져 오는 창건 설화에 따르면 능인대사가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습니다.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절을 짓기 위해 도력으로 종이학을 접어 날렸습니다. 종이학이 봉황이 되어 앉은 자리에 가서 보니 절터가 너무 좋아 보여 의상스님의 하명을 받아 봉황 `봉`자에 머물 `정`자에서 봉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내는 아늑하고 정감 넘치는 시골 외가나 고향 집 느낌입니다. 만세루에 오르는 계단길이 소박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문턱이 낮아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문지방을 넘으면 소담한 수련의 장소 친근하고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봉정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산지 중정형 구조의 가람 배치는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만세루는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 되었다고 합니다. 정면에서 보면 2층이지만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된 만세루는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문입니다. 17세기 후반에 건실하면서도 당당한 건축 기법이 잘 나타나 있는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열린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자연과 벗하면서 담소도 나누고 여러 가지 서로 교류도 할 수 있는 그러한 장소로서 가장 적합한 공간이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아래층 가운데에 출입문을 두었으며 따로 문이 달려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 단순히 건물만 있었다면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대웅전
사실 극락전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결코 극락전이 중심건물은 아닙니다. 절의 중심은 엄연히 대웅전입니다. 국보 제311호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건축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극락전보다 못할 것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만세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으로 대웅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의 건축 양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건실하고 힘찬 짜임새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건물과 장소와의 조화입니다. 서양에서의 마당은 정원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동양에서는 활동이나 생활의 기능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건물을 지을 때 건물과 주변의 공간도 함께 중요하게 인식해 왔습니다. 그만큼 조화를 중시했는데 마당에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이를 생활하는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옥에서나 볼 수 있는 퇴마루를 이곳 대웅전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방 안과 바깥의 중간쯤 되는 공간, 마루는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건축 양식은 물론 내부 단청에서 조선 초기 양식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특히 내부 우물반자에 그려진 용, 금박으로 정교하고 도드라지게 그려진 연화당초문 등은 조선 전기 단청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화려한 채색은 대웅전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천장에 크게 그려진 용의 모습 뿐만 아니라 대들보의 그림으로 또는 조각으로 새겨진 용의 수가 무려 아홉 마리나 되는데 이는 신성함을 상징하는 한편 이곳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지키겠다는 굳센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극락전
대웅전의 왼편으로는 우리나라 목조 건축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전이 위치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봉정사에 대한 창건 이후 뚜렷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참선 도량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아홉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지나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국보 제 15호 봉정사 극락전은 그대로 제 모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극락전의 진면모는 1972년 해체 보수 공사 때 밝혀졌습니다. 당시 발견한 상량문에서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보다 더 오래 전 건물이 조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문의 형태가 양쪽 측면에 광창이라고 하는 살대로 고정하고 한지가 발려지지 않고 바람이 바로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바닥 구조가 좌우측으로 전돌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신을 벗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신을 신고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신을 신고 들어간다는 건 좌식이 아니라 서서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연등 천장이라고도 불리는 천장 구조는 세밀하고 섬세한 당시의 건축 기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의 벽화 등을 통해 확인했던 시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바로 천정에 있는 채색 방법입니다. 고려시대 채색 방법은 동물의 기름을 뽑고 자연의 꽃을 그대로 버무려 채색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의 방식이 대웅전의 천정에도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변하지 않고 잘 보존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승격되었습니다.
영산암
이곳 봉정사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큰 돌과 작은 돌을 잘 끼워 맞춘 길고 높은 계단을 오르면 영산암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아서 편안하고 고요해서 그윽한 암자, 영산암은 초목들이 뿜어내는 생명의 기운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세루를 통해 들어온 봉정사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면 이곳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공간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음악에서는 음과 음 사이 여백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전통 건축에서는 건물 자체가 아닌 방과 방 사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단일 건물보다 집합으로서의 건축적 조화를 우선으로 여긴 공동체 문화와도 연관이 깊습니다. 영산암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여섯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소담한 공간 안에는 아담한 화단과 자연석 계단, 바위, 반송과 배롱나무 등이 어우러져 각별한 정겨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을 품고 있는 사찰이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천등산 봉정사는 살아있는 수행의 도량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치는 보다 나은 미래로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