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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대학과 한문불전대학원, 그리고 국내 최대 비구니 교육 도량 청도 운문사, 나반존자 기도 도량 사리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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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 아래 장군평 평지 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입니다. 산지 가람에 속하지만 경내의 배치는 평지 가람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남쪽은 운문사, 북동쪽은 호거산, 서쪽은 억산과 장군봉이 사찰을 감싸고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 18년(557) 한 승려가 금수동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후 절을 짓기 시작하여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보갑사는 폐사되었으며, 대비갑사는 대비사로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명맥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600년 원광 국사가 중창하고, 930년 보양 국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하였습니다. 973년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도운 보양 국사에게 보은의 뜻을 담아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전지 500 결을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대작갑사의 명칭을 운문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금당 앞 석 등을 비롯하여 9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어 문화재로도 중요한 곳입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우측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수령 500년에 이르는 처진 소나무가 작은 숲을 이룬 듯 있습니다. 푸른 기상은 수행자로서의 청정함을 상징하고 넓게 자라 큰 그늘은 스님이 되어 학인들에게 널리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보살 정신을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1994년에 건립된 대웅보전은 상단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과 대세지, 문수, 보현 관세음보살 등 사대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좌측에는 신중탱화와 우측에는 53 선지식 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지 않아도 공덕을 쌓을 수 있다`라고 하는 윤장대는 80권의 화엄경을 봉안하여 불단 좌우에 안치하였습니다. 보물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이 비로전 앞 좌우측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려 숙종 10년(1105) 원응국사가 건립한 비로전은 `두루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을 가진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포괄하여 대표하는 법신불로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을 맺고 있어 여타의 불상에 비해 알아보기 쉽습니다. 비로전 앞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3층석탑으로 보물 제67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층 기단부에는 부처님을 외호 하는 사천왕, 팔부중, 십이지신장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위 3층에 탑신이 올려져 있습니다. 오백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보처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그리고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입니다. 나한이란 아라안을 줄인 말로써 공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하며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른 사람으로 인간이 가진 욕망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 생사의 윤회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말합니다. 특히 운문사 오백전에 모신 오백나한은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 분 한 분께 공양을 올리는 오백미 공양이라는 독특한 전통이 있습니다. 일체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져 즐거움을 주겠노라 서원을 세운 대자대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 있습니다.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작압전은 전면 측면이 모두 한 칸에 불과한 아주 작은 건물입니다. 불당 가운데에는 보물 제317호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제318호 사천왕 석주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특히 석주는 마치 최근에 제작한 것처럼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합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사천왕 석주는 그 예가 드물어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리암
운문산에는 네 개의 굴이 있습니다. 동쪽은 사리굴, 남쪽은 호암굴, 서쪽은 화방굴, 북쪽은 묵방굴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리굴에서 쌀이 나왔는데 한 사람이 살면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두 사람이 살면 두 사람 몫의 쌀이 나왔다고 합니다. 하루는 공양주 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어 구멍을 넓히고 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장소는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지금은 영험한 도량으로 많은 불자들이 기도를 올리는 곳입니다. 사리암의 역사는 고려 초 보양국사가 930년에 초창하였고, 조선 헌종 11년(1845)에 효원대사가 중창하였으며 이후 두 차례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리암의 천태각은 조선 헌종 11년(1845)에 신파대사가 초창하여 나반존자상을 봉안하였습니다. 나반존자상의 후면에는 조선 철종 2년(1851)에 봉안한 독성탱화와 1965년에 경봉화상이 점안한 산신탱화가 함께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곳 사리암은 국내에서도 이름 있는 나반존자의 기도처로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암자입니다. 나반존자는 석가여래께서 돌아가신 후 미륵불이 출연하기까지 부처님이 계시지 아니하는 동안에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우신 분입니다.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항상 천태산상에서 선정을 닦으며 열반에 들지 않고 말세 중생의 복밭이 되어 미륵불을 기다리는 존자입니다. 나반존자의 친견은 천태각에 직접 올라가서 친견하거나 관음전에서 친견할 수 있도록 적멸보궁과 같이 유리문을 통하여 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져 있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눈썹이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고 넓은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나반존자는 `홀로 깨우친`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찰에 독선각이 있으며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사리암은 나반존자의 영험한 기도도량입니다.